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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야 할 선교와 되는 선교의 끊임없는 긴장

by 괴수땅콩 2009. 8. 13.

출처 : http://shalom.byus.net

이 글은 박혁순 목사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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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학적 관점에서 본 영화 「미션」에 대한 평론입니다.

 영화감독 롤랑 조페가 과연 기독교신자인지 혹은 기독교 선교에 모종의 소양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형상화한 영화 『미션』은 우리의 선교 사업에 던지는 문젯거리는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식'이 되어야할 '선교'가 인간적 욕망과 사업을 통할 때, 자칫하면 얼마나 곡해되고 비인간화되는지 교훈하고 있는 있는 것이지요. 그럼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되어야 할 선교와 되는 선교의 끊임없는 긴장 - 롤랑 조페, 『미션(The Mission)』(1986)

 

Ⅰ. 들어가며

영화 『미션』은 1986년 제5회 깐느영화제에서 대상을, 오스카의 6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이다. 이 영화의 감독 롤랑조페(Roland Joffe)는 1984년에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로 데뷔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데, 90년대에 들어서 만든 『시티오브조이(The City of Joy)』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주로 삶과 죽음, 순수와 열정, 사랑과 우정 등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주제를 다루며 지금껏 최고의 배우 및 스텝진, 최고의 음악감독(엔니오 모리꼬네)을 동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우리는 이상에 언급한 세 가지 영화로부터 인간 상호의 신뢰와 이상적 가치를 지향하고 어떤 위기에서도 순수를 보존하려는 의지적 주인공들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결국 감독이 애착을 갖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미션』만큼은 그런 식으로 재단될 수 있는 예가 아닌 것 같다. '멘도사'의 역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로버트 드 니로'가 이 영화를 완성한 이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후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미션』은 다분히 심도있는 종교성과 영성마저 함의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영화 『미션』을 평하는 데에 있어서 기독교의 선교학 및 선교사(宣敎史)적 틀 안에서 다음 몇 가지 물음을 견지하고 논하고자 한다: 첫째, 18세기 제국주의 식민시대의 세속권력과 교회의 역학관계는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둘째,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어떤 방식으로 선교적 이상을 실현해야 했는가? 셋째,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두 선교사(가브리엘과 멘도사)가 각각 선택한 대처방식들이 어떠한 점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가? 넷째,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정치적 힘의 논리가 현재에도 유효한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선교사업은 어떻게 갱신되어야 하며 추진되어야 하는가?

 

Ⅱ. 영화『미션』과 우리 '미션'의 이야기

 영화 『미션』은 1750년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접경지역에서 '과라니'족을 선교했던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재구성했다. 당시는 식민주의, 중상주의에 의탁하여 유럽의 강국이 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에 영구적인 식민사업의 기반을 다져가는 때였다. 사실 이 두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구성원간에 민족의식이 성장하고 잠재력 있는 신흥 자본가계급이 부상하고 있는 터에, 고압적인 교황청의 그늘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내정을 구현하려고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만연해 있었다. 종종 정치적이 문제가 종교적 타당성을 얻어야 됐고, 교회의 사업 또한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되곤 했었지만 유럽 본토에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많은 경우에는 식민지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되곤 했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폭포 위에 위치한 원주민 선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구획정리'가 필요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 선교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많은 개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 내지 양도가 없으면 세속국가가 점령할 수 없는 구도가 되어버렸다. 이제 피식민지의 가장 궁벽진 곳에서까지 교황청 특사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치꾼 사이에 모종의 타협이 진행된다. 주인공 가브리엘 신부가 선교한 그 부락은 지리적으로 애매한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저 개척한 교회측의 승인 없이는 누가 그곳을 정치적으로 지배할지 미정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당국자들은 어짜피 둘 중 하나가 지배할 터이니 싸울 것 없이 교회의 판가름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세상 권세와 제도권 교회의 유착관계를 보게된다. 가브리엘 신부가 헌신적으로 일궈놓은 선교회의 주체나 원주민의 자주적 결정이 아닌, 바깥 세계의 힘의 논리가 모범적인 선교 사업을 일거에 말소해버린다. 원주민에게 영혼이 있을 리 없다던 식민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제도권 교회는 이제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거나 노예로 전락시키고 평화로운 마을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것을 방임하게 된다. 세상 권력에 맞서 하나의 세포막과 같이 미약한 지교회를 지켜내고 보양하기 보다 본교회의 정치적 이권을 보장받기 위해 그것을 팽개치는 파렴치한 처사를 감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는 예수의 권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야욕에 찬 세속국가와 다름없는 권력의 한계를 노출시켰다. 한편 그러한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성직자가 보였던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번민을 가져다준다. 가브리엘과 멘도사가 보였던 반응이 그것이다. 가브리엘은 시종 사랑과 평화의 사도적 이미지를 견지한다. '오보에'를 연주함으로써 배타적인 원주민과 접촉을 시도하는가 하면, 노예 사냥꾼 멘도사를 인내와 용서로 포용하여 신부로 갱생하게끔 도와준다. 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교황청의 특사가 있는 공식적 자리에서는 전폭적으로 원주민의 입지를 옹호하며 변호한다. 예컨데 포르투갈 후작이, "원주민은 영혼이 없는 짐승이며 자녀가 둘 이상이 되면 낳은 자녀를 죽이는 야만족"이라는 논지로 교황청 특사를 설득할 때, 가브리엘은 아름다운 성가를 부르는 어린아이로 영혼이 있음을 변호하고 "자녀 살해 풍습은 백인 침략자를 피해 아이를 안고 달아나기 위해서"라고 이해를 구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마을을 습격하는 군대에 대해 대처하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모교회의 명령과 결정에 순종해야한다는 입장을 멘도사에게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식민 군대가 마을을 초토화시키며 인디언들을 노예로 속박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떤 폭력과 물리적 방편을 강구하지 않고 원주민 교회로부터 부녀자와 아이들을 이끌고 십자가 행진을 감행하다 총에 맞아 숨진다. 그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여 표출한 것 같다. 곧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의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총구의 이슬로 덧없이 사라진 가브리엘과 그의 고귀한 정신이었지만, 고맙게도 감독 롤랑조페는 마지막 씬(scene)에 부활과 소생의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영원성과 초월성을 내비추었다. 반면 좌충우돌하는 수도사로 변모한, 노예 사냥꾼 멘도사는 가브리엘과 대조적인 노선을 취한다. 과거에 그들을 포획하고 죽이고 내다 판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에 의해 '거듭난' 그는 과라니 소년을 벗삼아 그들에게 헌신하며 부족과 함께 낙원적 삶을 만끽한다.이제 피를 보는 사냥에도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냥도구도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막상 외부의 도발에 반응했을 때에는 살기등등한 '투사'로 다시 한번 변모한다. 우리가 이를 심리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선교지 밖에서 악마 같은 삶을 살아왔으나 이제 세상의 풍조와 생리를 증오하게 된 멘도사는 이 외딴곳의 평화로운 선교지를 참회와 안식의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마을이, 과거의 자신과 같은 강포자에 의해 짓밟히게 되는 것을 용납하기란 만무했다. 그는 뜻이 맞는 다른 선교사와 남자들을 규합해 병력을 조직하고, 무기를 준비한다. 곧 과라니족과 함께 사활을 같이 할 각오로 식민군대의 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군과 교전했을 때에는 병사들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자신마저 총에 맞게 된다. 멘도사가 택한 방식은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유효했다. 자신의 신앙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태도는 실질적으로 선교지 교회를 보호하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우유부단함과 소극적 대응보다는 자신이 선교했던 부락민을 목숨으로 섬기고 안위하려는 멘도사 또한 우리 시대에 찾기 어려운 성인의 일례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세상의 것과 비교해 채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상의 화평과 사랑을 구현하려는 신앙의 덕목들이 한 순간 '무기를 쥔' 방어자의 논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곧 칼에는 칼로 피에는 피로 응대하겠다는 처사는 그 같은 상황 아래서 통할지 몰라도, 자신의 칼에 죽은 '원수'의 구원과 복락에 대해서 능히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 영화에서 찾아지는 갈등의 구조는 현재 우리가 당면하는 삶의 모든 정황에 잘 들어맞는 알레고리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아의 대(對)세계적 실현 의지와 세계의 대자아적 억압 구조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착안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러한 긴장 관계가 우리의 선교활동에 내재되었느냐'는 점이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선교하셨던 그 순간서부터 여태까지 인간은 그러한 괴리들로 인해 하나님과 조율하고 있고, 지상의 '선교들'도 부단한 갈등과 왜곡 속에서 참된 선교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 선교는 전례없이 다양하고 급변하는 피선교지를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몰락한 동구권일 수 있고, 격변하는 제3세계권일 수 있고, 신음하는 '여성'일 수 있고, 부유하는 '민중'일 수 있으며, 냉랭한 서구 기독교권일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선교지를 놓고 우리는 무슨 묵시(vision)와 메시지로 그들을 일깨우고,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의 됨됨이로 살게끔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당위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영화 『미션』이 시사하듯이 세상 권세가 우리로 하여금 자본친화적 생리와 폭압적 양식을 원용하도록 요구하고, 기독교적 이상을 현실에 맞춰 순응하게 하며, 역동적인 선교사업을 관료화하게끔 유도한다 하더라도 '아니다'라고 대답할 다짐은 바로 지금 내릴 수 있다고 본다.

 

Ⅲ. 나가며

 감독 롤랑조페가 과연 기독교신자인지 혹은 기독교 선교에 모종의 소양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형상화한 영화 『미션』이 우리의 선교 사업에 던지는 문젯거리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식'이 되어야할 '선교'가 인간적 욕망과 사업을 통할 때, 자칫하면 얼마나 곡해되고 비인간화되는지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세기 제국시대 서구 열강의 식민정책은 곧바로 피선교지의 선교사업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공격적이고 패권적인 선교양식에서 나타난 오류만이 아니라 선교사업을 주관하는 중앙기관과 관리들의 몰지각화였다. 그들은 피식민국의 선교지를 지엄한 하나님의 영역으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 국가와 거래 대상으로 여기고 탁상정치의 희생물로 소모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 당국자나 선교사는 전근대적인 권력구조 아래서 파견기관의 정치적 결정에 순응하는 한계를 보였다. 나름대로 독자적인 자치를 도모하는 경우에는 무력진압의 표적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활동은, 당시 여러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의 사업들 가운데 하나이지 교회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업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딜레마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천상적 가치를 함의한 선교가 막상 사람의 손에 맡기워졌을 때, 우리는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정치 논리에 말려들 수 있고, 선교 이상(理想)의 타락과 선교기관의 관료화의 고질적인 병폐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