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원자탄' - '손양원'목사님의 9가지 감사
출처: http://blog.naver.com/khi4040/20011310976
'사랑의 원자탄' -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
위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이고도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과 진정한 뜻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난지 엿새 후, 1948년 10월 27일에 있었던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은 9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중에 어쩌면 이렇게도 귀한 보배 사역을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하신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
넷째, 두 아들이나 순교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다섯째, 누워서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복인데 끝까지 전도하다가 총살로 순교당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여섯째, 미국을 가려고 준비중이었던 두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보내주셔서 내 마음을 안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 들이 생길듯이 믿어지니 하나님께 감사,
아홉째, 이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의 진리(眞理)와 사랑과 신애(信愛)를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 이와 같은 내용의 답사가 계속되는 동안 식장은 눈물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바와 같이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형수 "안재선"을 살리려고 각계에 호소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그를 자신의 양자로까지 삼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말씀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차도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감사와 참된 용서를 바탕으로 한 진하고 진한 사랑은 점점 흉포화 되어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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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장례식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그 후
"손양원 목사님"이 옥중에 있던 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은 해방되었고 당연히 "손양원 목사님"도 출옥하였으며 가족들도 다시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등 당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우리나라는 통한의 38선으로 가로막히고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쪽에서도 여전히 공산당이 남로당이라는 이름으로 잔재했습니다. 그들은 1948년 4월 제주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해 10월에는 전남 여수에서 소위 「여순 반란사건」으로 일컬어지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소속 3천여 명의 군인들이 남로당 간부들의 책략에 빠져 일으킨 비극(悲劇)이었습니다.
반란군은 1948년 10월 20일 순천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는 하숙을 하며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순천에 진입하자 그간 숨어있던 좌익분자들이 무섭게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날뛰던 좌익분자 청년들은 당시 학교에서 기독교학생회장직을 맡아 기독교 활동을 열심히 했던 큰 아들 "동인"이와 역시 독실한 크리스쳔이었던 그 동생 "동신"이를 붙잡아 1948년 10월 21일 차례로 그들을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동인"이와 "동신"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붙잡이면서부터 나무에 묶여 총으로 무참하게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좌익분자 청년들에게 권유했으며 마지막에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부르며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까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물밀듯이 남침하여 불과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전남 여수가 공산군의 손에 함락된 것은 그해 7월 27일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이론인 유물사관에 의한 계급 투쟁론을 주장하기 위해 어떠한 형태의 종교이든지 그것을 마약인 "아편"이라고 까지 말하며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손양원 목사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설교 주제가 온통 순교였습니다.
9월 13일 정오쯤에 공산당들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던 "손양원 목사님"을 연행해 갔습니다. 그들은 12명이 정원인 유치장에 30명이 넘는 양민과 교인들을 몰아 넣고 꽁보리밥 한 덩이씩 주었는데 그때마다 "손양원 목사님"은 밥덩이를 쪼개서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10여일 후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몹시 불리해진 공산군들은 매우 당황해 하며 2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순천으로 이송한다면서 밤 10시쯤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미군기의 공습이 있으니 組를 짜서 組別로 나누어 가자고 속이고, 차례로 끌고 가다가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모두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님"도 미평 가수원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처절하게 목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그 날은 바로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이 유엔군과 우리 한국군에 의해 탈환되었던 1950년 9월 28일 새벽이었고,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의 나이는 향년 49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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