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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토론을 보고...대한민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다

by 괴수땅콩 2009. 8. 13.

100분토론을 보고...대한민국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다 [1049]

번호 2081417 | 2008.12.05

 

미국에서 귀국한지 2달, 처음으로 100분 토론을 끝까지 보았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필이면, 아주 민감한 좌편향 교과서 수정문제...  왠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착잡했습니다.  10년전 겨울, 내가 떠나기 전의 대한민국은 IMF한파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유례없다는 심각한 세계대공황에 해묵은 이념문제까지 섞여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토론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교과서 수정에 관한 절차적 문제, 그리고 특정 교과서 (금성교과서)의 내용에 관한 판단문제로 나눠져서 각 패널들이 토론하였습니다.  민감한 사항이다보니, 클로징 멘트에서 손석희 교수님이 말했듯이, 의견이 모아지지 못한채로 마감하였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수정절차이던 내용판단이던, 정치세력의 압력이 있었는지 아닌지였던 것 같습니다.  교과부에서 수정권고안을 먼저 제시하였고, 필자들이 수렴하여 다시 수정안을 제출한 이후, 교과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1차 수정권고안과 거의 비슷한 수정지시안을 내었습니다.  분명, 절차상으로 법적으로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국장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니, 최초의 수정권고안을 그대로 밀고 나간듯이 보입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필자들의 의견은 수렴할 생각이 없었으며, 1차, 2차로 나눠서 한 것은 그저 절차상으로 따르고자 한 의도입니다.  소스를 밝히지 않은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교장 왈 "교과부땜에 못살겠다", 전교조원 왈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등등) 내용을 정리하자면, 정부는 수정안을 그대로 밀고나가겠다는 - 필자들과 저작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 협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권력이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용판단에 관한 문제를 짚어보자면, 몇가지 구절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에 대한 비판이라던지 또는 북한에 대한 미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신지호 의원 (이름이 맞는지 잘 모르겠네요...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서)은 "반대한민국"이라는 위협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비판했는데요... 그 "반대한민국"이라는 용어는 도대체 누가 정의하는 것인지, 어떤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정의되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뉴라이트라는 한 단체에서 정의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교과부장관이 정의하는 것인가요?  역사학자들의 의견수렴과 논문들에서 도출해낸 정의인가요?  내용판단의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대한민국"이라는 엄청난 위협적인 용어를, 그것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자가 웃어가면서 썼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신의원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반미와 친북은 무조건 "반대한민국"이라는 이분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친미와 반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언제부터 이런 상대적인 개념을 통해서 정의되는 것이었나요?  이런 개념정의는 다수의 역사학자들과의 심층토론을 통해서 이뤄진 건가요?  아님, 현정부의 의견에 의해서, 또는 현정부의 정통성을 마련하고자 이용되고 있는 건가요?

 

저는 미국에서 그다지 짧지 않은 기간동안 한국학을 공부했습니다.  저의 전공은 한국의 시민사회와 정부의 역할이었으나, 한국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필수과목으로 공부했습니다.  매 학기마다 수십권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개의 관점을 달리 접하였고, 때로는 애국심에 분개하고, 때로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이런 표현의 자유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수립과 그 이후의 발전사, 역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논문도 읽고 수업에서도 다뤄졌습니다.  그러나, 북한을 악의축으로 규정하였던 부시 행정부는 해당 대학의 교수에게, 혹은 해당논문에 대해 "수정지시안"을 내리지 않습니다.  학문의 영역으로 존중하고, 다른 관점의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초중고와 대학은 다를 수 있다고요?  판단력이 흐린 아이들에게 여러 관점을 배우게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요?  아닙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여러가지를 접하고 판단력을 키우도록 교육해야하는 것입니다.  좌편향교과서가 문제가 되어서 수정된 이른바 "우편향"교과서를 익히면 아이들이 더 올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가질수 있는 걸까요?  더욱더 한쪽으로 치우쳐진 역사관을 익혀서, 올바른 판단의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화연결되었던 서울시의원의 얘기가 생각납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에 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서, 건국 60주년을 맞아 이번 고교특강을 기획했다고...  시장경제가 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연장선에 놓고 보았을때, 좌편향 교과서 문제에 관한 정부의 행동은 그야말로 "반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의견수렴과 토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고칠것을 명령하고, 현 정부의 의견에 맞추어 원칙과 정의를 내세워, 그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을 쓸어내려고 하는 시도들.  목소리 큰 소수가 침묵하는 다수를 지배한다는 얘기가 여기에 딱 맞는 것 같았습니다.  우매한 민중을 선도하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정부가 주도해서 여론을, 그리고 역사를 재해석한다는 것.  경제위기를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정부가 주도해서 벌이는 일종의 쇼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97년 겨울, 한국을 떠나기전 경제위기와 색깔론이 연일 매체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같은 주제가 매스컴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은 좌편향을 배척하고 우편향으로 전향해야지만, 그리고 정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지만, 성립되어 진다는 사실이 무섭기만 합니다.  해묵은 색깔논쟁과 정부주도 의식개혁에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안타깝기만 합니다.